The Gallaudet Legacy: Pioneers Who Unlocked the World for Deaf Education

갤러뎃 유산: 농인 교육의 세계를 열어준 개척자들

이미지 출처: 1990-2025 ABILITY Magazine

워싱턴 D.C.의 중심에 위치한 갤러드 대학교는 전 세계 농인과 난청인의 자립과 권한 강화를 위한 등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학의 역사는 농아 교육의 지형을 바꾼 두 명의 선구자—아버지와 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토머스 홉킨스 갤러드 (1787–1851)

  1. 운명적인 만남이 사명을 촉발하다
    • 1814년, 토머스는 이웃이자 의사인 메이슨 코그스웰 박사의 8세 난청인 딸 앨리스를 만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난청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전무하여 그녀의 고립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그녀를 교육할 방법을 반드시 찾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농아 교육법을 배우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 난청인 교육자와의 역사적인 협력
    • 파리에서 그는 왕립 농아교육기관의 청각장애인 교육자 로랑 클레르를 설득해 미국으로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클레르는 계획적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난청인이었으며(1816년), 두 사람은 1817년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미국 최초의 난청인 학교인 American School for the Deaf를 공동 설립하였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수화를 미국 현지 농인들의 수화 전통과 결합하여 미국 수화(ASL)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3. 목사가 될 뻔한 인물
    • 농아 교육에 헌신하기 전, 토머스는 신학을 공부하고 회중교회 목사로 서품받았습니다. 그의 종교적 배경은 청각장애인의 도덕적·지적 잠재력을 믿게 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게 했습니다.
  4. 마지못해 얻은 명성
    • 공공의 명성보다는 교육과 집필을 선호했지만, 토머스는 미국 최초의 농인 교재 중 하나인 A Concise System of Instruction for the Deaf and Dumb(1832)를 저술하며 농아 교육 분야의 국가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마이너 갤러드 (1837–1917)

  1. 놀라운 젊은 나이에 책임을 인수하다
    • 에드워드는 1857년, 단 20세의 나이에 원래 그 역할을 맡기로 했던 형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Columbia Institution for the Deaf and Dumb and Blind(갤러드 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46년간 기관을 이끌며 학위 수여 대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2. 세계적 압력에 맞선 수화 옹호자
    • 1880년 이탈리아 밀라노 회의에서 세계 교육자들은 수화를 금지하고 ‘구강법’(농인을 말하고 입술을 읽도록 가르치는 방법)을 채택하기로 투표했으며, 수화를 ‘원시적’이라 비판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단호히 “선천적이고 완전한 청각장애일지라도 지적 발전에 한계가 없다”고 선언하며 수화 교육을 고수해 ASL이 갤러드에서 핵심 교육 도구로 유지되고 농인 문화 정체성이 보존되도록 했습니다.
  3. 대통령과의 인연
    • 에드워드는 직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 대학 학위를 수여할 권한을 Columbia Institution에 부여해 달라고 청원했으며, 링컨 대통령은 1864년 이 법인을 승인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농인 대학이 탄생했습니다. 학교는 이후 1894년 갤러드 칼리지, 1986년에는 갤러드 대학교로 개명되었으며 이는 그의 아버지 토머스를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4. 캠퍼스 랜드마크인 ‘하우스 원’에서의 생활
    • 에드워드는 1869년에 지어진 35개 방의 빅토리아 고딕 양식 저택 ‘House One’에서 거의 50년간 거주했습니다. 현재 국가지정 역사적 명소인 이 집에는 그가 캠퍼스 회의 참석 시 몰래 들어가던 비밀 계단과 전 세계 농인 운동가 및 학자들을 초대한 식당이 있습니다.
  5. 가족의 옹호 유산
    • 에드워드의 딸 메이블 갤러드 허버드는 전화기의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결혼했습니다. 벨은 후에 구강법을 지지했으나(에드워드의 신념과 상충), 가족 간 유대는 견고했으며 메이블은 난청인 관련 권익 옹호 활동에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공유된 유산과 특징

  • 시간에 멈춘 동상: 토머스 홉킨스 갤러드와 앨리스 코그스웰의 캠퍼스 동상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후에 링컨 기념관 조각 제작)가 1889년에 제작했습니다. 앨리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 사명을 불러일으킨 ‘선물’을 상징하며 토머스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평생 학습자: 두 사람 모두 여러 수화 언어에 능통했는데, 토머스는 프랑스 수화(LFS)와 초기 미국 수화를 익혔고, 에드워드는 ASL에 능하며 평원 부족의 토착 수화도 연구했습니다.
  • 부정적 용어에 맞서다: 그들은 교육기관에서 ‘말 못함’의 의미로 사용된 ‘dumb’이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deaf’라는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옹호하였으며,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인내의 증거였습니다. 토머스는 한 아이의 필요를 국가적 운동으로 전환했고, 에드워드는 대학 수준의 농아 교육을 발달시키며 농인 문화를 지우려는 세력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오늘날 갤러드 대학교에 울려 퍼지는 존엄성과 권한 강화의 유산을 구축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갤러드 부자는 어떻게 미국 수화(ASL) 창출에 기여했나요?

토머스 홉킨스 갤러드는 1816년 프랑스의 청각장애인 교육자 로랑 클레르와 협력하여 프랑스 수화(LFS)를 미국에 도입했습니다. 미국 농아 학교(1817년)에서 이들은 LFS와 현지 농인 공동체가 사용하던 토착 수화 전통을 결합하여 ASL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에드워드 마이너 갤러드는 전 세계 구강법 운동에 맞서 수화를 옹호하며 ASL이 갤러드의 교육 과정과 농인 문화 정체성의 핵심으로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에드워드 마이너 갤러드가 농아 교육 발전에서 겪은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에드워드가 맞선 가장 큰 도전은 1880년 밀라노 회의로, 전 세계 교육자들이 수화를 금지하고 구강법으로 대체하기로 투표했습니다. 이 방법이 더 ‘문명화된’ 것이라 주장되었습니다. 그의 사위이자 구강법 지지자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을 비롯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수화를 포기하지 않고 수화가 있으면 농인도 지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저항은 ASL과 농인 문화의 자율성을 갤러드 대학교에서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갤러듣 대학교 캠퍼스에 갤러듣 가족을 기리는 물리적 기념물이 있나요?

네! 캠퍼스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물이 있습니다:
토마스 홉킨스 갤러듣 & 앨리스 콕스웰 동상 (1889),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조각했으며, 토마스의 평생 사역에 영감을 준 두 사람의 중요한 만남을 묘사합니다.

에드워드 마이너 갤러듣 저택 (하우스 원), 그가 50년간 거주했던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저택으로 현재는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평생의 헌신을 상징하며, 캠퍼스 내 비밀스러운 출입을 위해 사용했던 비밀 계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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